예술 창작은 열렸지만, 예술 가치의 문은 닫혀 있다
AI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장 중심 가치체계
최근 예술계는 생성형 AI의 급격한 확산으로 인해 생산 방식, 창작 주체, 가치 판단 체계가 동시에 흔들리는 전례 없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인간 예술가와 제도가 축적해온 문화자본 중심의 구조는 기술자본을 보유한 플랫폼 기업과 알고리즘의 부상으로 압박을 받고 있으며, 예술의 개념과 장의 규칙 자체가 재구성되는 현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도구의 확장이나 매체의 전환을 넘어, 예술이 사회적 제도와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아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두 논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 장의 권력 변화와 인공지능 미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역학을 분석하며 오늘의 예술이 직면한 구조적 전환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 문화사회학적 관점으로 본 인공지능 미술: 클링게만과 허스트의 사례를 중심으로, 강교정, 2025, 예술학 박사 학위논문 |
강교정의 박사학위논문 「문화사회학적 관점으로 본 인공지능 미술」은 인공지능이 예술 창작의 구조를 바꾸는 과정에서 문화적 불평등을 어떻게 약화시키거나,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재생산하는가를 탐구한 연구이다. 인공지능 미술을 기술·예술적 측면에서만 논의하는 기존 연구들의 한계를 넘어, 이 기술이 실제 문화계의 권력 구조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논문은 문화자본론과 옴니보어 이론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클링게만과 허스트라는 상반된 작가의 사례를 분석하여 기술이 가져온 변화와 지속되는 불평등을 균형 있게 조명한다.
논문의 서론은 GAN·CAN과 같은 딥러닝 모델의 발전이 예술 창작을 자동화하고, 누구나 이미지 생성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기술 확장이 “문화적 접근성의 확대”로 해석될 수도 있고, 반대로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구별짓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특히 2018년 Edmond de Belamy 경매 사건이나, 2022년 제이슨 알렌의 Midjourney 공모전 수상 사례, 그리고 2023년 데미안 허스트의 AI 프로젝트 흥행 사례 등을 통해, 인공지능 미술이 이미 예술계와 시장에서 현실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연구 1] – 옴니보어와 인공지능 미술 (클링게만 사례)
[연구 1]은 ‘옴니보어 이론’을 활용하여 인공지능 미술의 제작 과정이 문화 소비의 다양화와 포용성을 어떻게 촉진하는지를 검토한다. 여기서 다룬 사례는 마리오 클링게만의 Memories of Passersby I. 이 작품은 GAN의 자율적 생성 과정이 작가 개인의 경험과 취향을 넘어 더 넓은 문화적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함으로써, 기존 예술가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다문화적 시각성을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논문은 인공지능의 “데이터 기반 잡식성”이 창작자에게 새로운 문화적 감각을 제공하고, 예술 창작 참여 장벽을 낮춘다는 점을 밝힌다. 이를 통해 기술이 문화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연구 2] – 상징자본과 인공지능 미술 (데미안 허스트 사례)
반면 [연구 2]는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상징자본 이론을 기반으로, 기술이 아무리 자동화되더라도 예술계의 권력 구조가 여전히 창작물의 정당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논문은 데미안 허스트의 AI 프로젝트 Beautiful Paintings를 분석하면서, 허스트가 이미 축적된 상징자본—명성, 경력, 고유한 작가 이미지—을 전략적으로 AI 창작물에 전이시키는 방식을 정교하게 짚는다. 허스트는 자신의 ‘스핀 페인팅’과 AI 작품의 시각적 유사성을 강조하고, ‘무작위성’이라는 개념을 두 장르의 공통된 미학으로 연결하며, SNS를 통해 창작 과정의 통제권을 자신의 것으로 재구성한다. 이 분석은 인공지능이 창작의 자동성을 높여도, 결국 “누가 만드는가”가 여전히 작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기술이 문화 불평등을 해소하리라는 기대가 지나치게 낙관적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논문의 결론은 두 연구가 보여주는 상반된 경향을 조화롭게 통합한다. 인공지능은 창작 접근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확대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예술계 내부의 상징자본 구조가 유지되는 한, 기술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불평등을 재생산할 수 있다. 즉,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의 자본과 사회적 위치가 인공지능 미술의 수용·평가·가치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밝힌다. 연구는 인공지능 미술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기계의 창의성”이나 “인간-기계 협업”이라는 미학적 논쟁을 넘어, 문화 권력과 불평등이라는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함을 제시한다.
| 생성형 AI가 재구성한 예술 장의 권력 구조, 우리중,하오화웨,최원호. 2025. |
논문은 최근 생성형 AI가 예술 생산과 유통 구조 전반을 뒤흔들면서, 기존 예술 장이 가진 권력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문제의식으로 삼는다. AI는 기존의 예술가와 기관이 쌓아온 문화자본, 제도적 권위, 권력 구조를 우회하거나 대체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미술관, 교육기관, 갤러리, 평론가 등 오랜 기간 축적된 체계는 한순간에 경쟁자를 맞닥뜨렸고, 새로운 생산 주체가 아니라 기술 기반의 알고리즘과 플랫폼이 경쟁자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변화들과 다르다. 저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통해 해석하며, 예술 장의 구조가 기술 자본 중심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장과 자본 개념
연구는 부르디외의 장, 자본, 아비투스 개념을 토대로, 예술 장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권위를 구축해 왔는지 살펴본다. 문화자본은 학력, 교육, 취향을 통해 형성되며 예술가와 제도는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 왔다. 상징자본은 비평, 수상, 전시 이력 등을 통해 축적되어 예술가의 위상을 강화하는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AI는 이러한 자본 축적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결과물만으로 장 내부에 진입해버리는 독특한 존재로 자리한다. 즉, 훈련되지 않은 주체가 전통적 자본 없이 장에 경쟁자로 출현하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기술 자본의 부상과 제도적 정당성의 이동
논문은 생성형 AI가 새로운 형태의 기술 자본을 중심으로 장의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전에는 예술가 개인과 제도가 권위를 독점했지만, 이제는 알고리즘과 플랫폼 기업(OpenAI, Stability 등)이 새로운 권위 생산자가 된다. AI 모델 자체가 하나의 창작 주체처럼 다뤄지며, 결과물의 폭발적인 생산 능력은 예술 장 내부의 규칙을 흔들고 있다. 기술 자본은 전통적 교육, 수련, 예술적 훈련을 우회하고, 데이터 학습 능력과 계산 자원이라는 새로운 권력 축을 만든다. 이 변화는 기존 예술가들에게는 위협이자,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양가적 현상을 낳는다.
가치 판단 구조의 재편
AI의 등장은 예술품의 가치 판단 메커니즘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전통적으로 예술의 가치는 희소성, 작가성, 제도적 인증에 의해 형성되었다. 하지만 생성형 AI의 작품은 생성 비용이 낮고 무한히 재생산될 수 있어 희소성이 붕괴된다. 또한 작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리며, 무엇이 창작인지, 주체는 누구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논문은 이러한 현상을 통해 예술 장에서 가치 결정 권한이 기존 제도에서 기술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새로운 심미적 기준이 형성될 가능성을 강조한다.
결론: 예술 장의 권력 구조 변화가 의미하는 것
논문은 생성형 A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예술 장의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행위자라고 결론짓는다. 전통적으로 예술 장을 지배하던 문화자본 중심의 구조는 약화되고, 기술 자본을 가진 기업과 플랫폼이 새로운 권력 축으로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가의 위치, 제도의 역할, 작품 가치 평가 방식이 모두 재구성된다. 저자들은 이 변화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장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결국 생성형 AI의 시대에는 기술과 예술이 상호 영향을 주며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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